뜨거운 볕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낯선 느낌에 도경수가 감은 눈을 떴을 때는 태양이 이미 한가운데 떠있었다. 얼떨떨한 가운데 거짓말처럼 그 순간조차 밀려드는 잠기운을 겨우 떨쳐내고 그는 몸을 일으켰다. 기다렸다는 듯 아우성치는 몸뚱이는 삐걱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꼭 어딘가에서 얻어맞은 듯 얼얼한 자욱들로 가득한 걸 확인한 동공이 제대로 초점을 잡았다. 내리깔았던 눈 위로 부서지는 볕이 따가워 손그늘을 만들었더니 마냥 눈부시던 시야에 그림처럼 잡힌 것은 낯선 것들 뿐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모양의 나무들이 가지를 옆으로 최대한 구부려 양옆으로 우뚝 자리한 가운데,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경수가 홀린 듯 발을 내딛었다. 자박이며 발바닥에 밟히는 풀잎 소리가 고요한 숲의 정적을 깨웠다. 나뭇가지들이 무성한 잎사귀들로 가리고 있는 중심부로 나오고서야 경수는 상황을 인식하고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여기가 어디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낮은 목소리에 대꾸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걸까? 불안해지는 가운데 절로 뜨인 눈이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는 중 푸른 나뭇잎들 사이로 손 하나가 느릿하게 스쳐갔다. 잠깐이었다고 착각할 리가 없으니, 저건 분명 사람이다! 마음이 급해진 경수가 방향을 바꿔 나갔다.

 저기, 잠깐만요!

 부르면서도 경수는 앞서 가는 이의 뒷모습이 상당히 낯이 익다는 것을 깨닫고 뻗었던 손을 주춤거리며 거둘 뻔 했다. 첫째는 불확신이오, 둘째로 찾아든 것은 현타였다. 아무리 닳고 닳도록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까지 볼 건 뭔가 싶었다. 이건 꿈일테지. 도경수에게 지금 보이는 것들은 꿈이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가 여기 자리하겠는가. 의아함이 몸집을 불려 커가고 아득함이 저를 잡아채 끝모를 바닥으로 내팽개치려고 할 때 경수가 그 이름을 담아 나지막이 불렀다.

 김종인?

 혹여 놓칠까 급하게 따라가던 경수의 걸음이 멈춤과 동시에 앞선 그도 우뚝 자리에 섰다. 이윽고 천천히 돌아보는 얼굴을 확인하고야만 경수는 질끈 두 눈을 감았다. 

 형?

 확신이었다. 도경수는 이것이 아무리 생생하다 할지라도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반복이라는 옵션이 가미된 자각몽. 여태 그랬던 것처럼 어차피 깨어나게 되면 다음에 이 꿈을 다시 꾸기까진 전혀 기억하지 못할테지만 이 순간만큼은 셀 수 없는 기억 조각을 하나 더 남긴다. 저를 선배님이라 부르며 살갑게 웃는 소년의 얼굴은 말갛게 핀 꽃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불러주길 기다렸다는 듯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아픈 눈으로 지켜보며 경수가 일그러진 미소를 보였다. 거짓말처럼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히고 경수가 그의 품에 안겼다. 도경수는 그것을 끌려들어갔다 라고 표현하고 싶었다. 기다렸단 듯이 어깨와 등을 감싸오는 단단한 두 팔과 귓가에 다가오는 숨소리가 해사하게 웃는 종인의 얼굴을 그리도록 만들어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귀가 붉어요.

 웃음소리와 감겨드는 목소리에 경수는 더 버티지 못하고 고갤 수그렸다. 이대로는 부끄러움에 터져 꿈속에서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 .... ...! ...!

 멍한 귓가에 흐릿하게 소리가 잡혀온다. 앞이 그저 검다는 것을 알아차린 경수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었다. 주위에 드문드문 몰린 사람들, 눈을 뜨니 아찔하게 아파오는 다리에 대한 인식이 밀려들다가 이어지는 확연한 음성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괜찮아요, 선배? 발목은?"

 김종인이었다. 김종인. 꿈이 아닌. 도경수의 큰 눈이 가만 깜박이며 상황을 정리했다.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던 도중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갤 든 경수는 상대가 얼마 전 옆집에 이사 온 종인임을 확인했다. 웃음기가 없으니 퍽 냉한 얼굴인 종인을 상당히 바보 같은 표정으로 보며, 한 박자 느리게 길을 건너려다 골목에서 나온 오토바이와 거의 충돌할 뻔 한 것을 비교적 침착하게 떠올린 경수는 애써 담담히 답했다. 

 "아. 별로 크게…"
 "삐끗했을 텐데?"

 정확히는, 하려고 했다. 한껏 낮아진 목소리와 함께 얼얼한 발목을 감싸주는 종인의 손길이 세심했다. 경수가 움찔하며 아픔에 얼굴을 찌푸리지 종인이 중얼였다. 부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근처에서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오토바이 운전자에게서 연락처를 받아내고 김종인이 경수를 일으켜세웠다. 

 "못 걸을 정도예요?"
 "그렇게 심하진 않아."
 "알만 하네요."

 애써 무뚝뚝하게 답하는 도경수에게로 한 살 어린 그가 얄궂은 코웃음을 쳤다. 거짓말은. 나한테 겨우 기대고 있으면서. 한쪽 팔을 제 어깨로 두르도록 만든 뒤 자신의 자전거 뒷자리를 가리키며 종인이 눈짓했다. 경수의 일편 무뚝뚝해보이는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여기 타라고?"
 "그럼 태워주려고요?"

 안 웃긴데. 김종인이 코를 찡긋하곤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갑작스런 접촉에 당황한 나머지 경수가 내지른 주먹이 종인의 코를 향해 박인 것은 작은 해프닝이었다. 미안하다며 어쩔 줄을 모르는 두 손을 겨우 붙들고 종인이 말했다. 미안하면 내 뒤에 타고 얌전히 집 좀 가요. 

 "……."
 "왜 말이 없어요? 아파?"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왜요?"

 말이라고 묻냐. 경수는 잠시 주춤하다 대답했다.

"남자 둘이 이러고 가려니 그림이 좀 그래서."

 좀이 아니라 사실은 상당히, 많이. 낮게 덧붙이는 소리는 도경수 자신이 뱉으면서도 실은 종인이 듣지 않았음 했다. 옆집 사는 형이 다쳤는데 그대로 가버리기 난감했던지 착한 김종인은 제 자전거 뒷자리를 내어주고선 집을 향해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었다. 종인이 떨어지지 않게 중심 잘 잡으라며 한 마디 했을 때 저도 모르게 잡아버린 허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앞을 보고 바람을 헤집는 김종인, 아픈 곳을 감싸 나를 싣고 가는 김종인. 단순한 호감이라고만 생각했던 감정이 날로 부풀어오름을 깨달은 경수는 종인의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도경수가 말이 없으려니 종인이 고갤 돌리지 않고 말했다.

 "남자 둘이 이러고 있으면 창피해요?"
 "어?"
 "그림이 좀 그렇다며."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칼이 짙었다.

 "난 상관없지만."

 혼잣말일까? 작게 덧붙이는 그 한 마디에 괜히 가슴만 덜컹이는 기분이었다. 경수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머릿속 실타래가 잔뜩 엉켜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이에 페달을 밟던 김종인이 농을 하듯 가볍게 말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동생 태우고 가는 기분이라서."
 "뭐야?"

 

 동생? 동새-앵? 장난기가 다분한 그 소리에 경수가 어이없단 듯 되풀이하는 단어를, 종인은 그저 곱씹으며 시원하게 웃었다. 선배님은 교복 입고 있으면 중학생 같아 보이거든요.
 
 "제가 좀 성숙해 보이잖아요. 남들 보기엔 형 동생으로 보이지 않을까?"
 "……."
 "미안해요. 근데 그만큼 어려보인단 뜻이에요."

 혹시 기분 상하셨어요? 넌지시 묻는 소리에 경수는 보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고개만 살짝 가로저었다. 대답없는 뒤편으로 종인이 결국 고갤 틀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너머에서 도경수가 기다렸단 듯 눈을 마주하며 분명한 소리로 말했다.

 "선배님 말고 형이라고 불러."
 "네?"
 "그냥, 그건 너무…"

 잠시 다물린 입술이 뻐끔였다. 거리감 느껴지잖아. 빙 돌아 풀어낸 진심을 차마 뱉을 용기가 없었다.

 "…딱딱해서."
 "그건 그렇죠?"

 경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김종인이 이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형도 제 이름 불러주세요."
 "어?"
 "매번 마주치면 제가 먼저 부르니 불릴 기회가 없었잖아요."

 형 동생 텄다는 기념으로. 그리고 넌지시 바라보는 시선에 생각할 틈 없이 소리가 나섰다.

 "김종인."

 종인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천천히 고갤 앞으로 돌렸다. 그보다 더 느릿하게 외는 말에 경수는 결국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형 목소리 듣기 좋아요."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키는 것은 꽤 코끝이 멍했다. 도경수는 들리지 않을 소리로 눈을 감았다. 네 목소리보다 듣기 좋은 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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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카디전력 주제 들장미 쓰다가... 중간에 의욕상실 중단ㅜㅜ
붉어진 경수더러 장미꽃 같다고 웃는 종인이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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