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00

E-DOI 2015. 10. 4. 21:29

 

 소년의 손바닥 안에는 세상이 흩날려 안착한 흔적이 남았다.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짓눌러보면 그것은 눈물이라도 되는 양 곳곳으로 흩어져버렸다. 내리깔은 눈꺼풀 새로 눈송이가 점점이 번져 앉았다. 하늘이 하얗게 열리고 그 한가운데서 도경수는 흰 김을 흘리며 서있었다. 시간이 흘러 제 나이에 지난 일 년을 새겨놓는 것은 새로운 성장을 의미했다. 바람이 힘을 실어준 눈발은 처음엔 제법 사나운 기세였으나 경수가 문을 열고 나섰을 땐 거짓말처럼 순해졌다. 사박이는 소리를 일정하게 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나였던 소리가 뒤이어 나란히 걷는 소리로 가득찼을 때, 어깨에 얹은 손길이 다정했다.

 

 겨울이잖아.

 

 곱게 눈을 휘며 웃는 얼굴이 익숙했다.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수는 제 뒤로 이어진 말들에 일순 멍해지고 말았다. 나뭇가지를 꺾어 돌연 내밀고 웃는 얼굴이 시원했다. 맞장구를 치며 어깨동무를 하는 팔이 단단했고, 들꽃으로 엮은 화관을 장난스럽게 경수의 머리에 씌워주는 이의 만족스러운 끄덕임이 이어졌다.

 

 곧 봄이 찾아오고,

 새순이 돋아날테지.

 

 목도리를 길게 늘여뜨리며 풀던 이가 흐드러진 동백꽃을 경수에게 내밀었다.

 

 보고 싶기도 하지만,

 

 넘어온 머리칼을 뒤로 넘기면서 또박또박 말을 받아가는 목소리가 사근사근했다.

 

 돌아오면 우리 곁으로 오면 되니까.

 

경수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나치면서 그들의 눈을 마주했다. 비슷한 홍채 색이었지만 저마다 꼭 다름을 새삼 느끼며 경수가 고갤 끄덕였다. 머리에 씌워진 화관이 주춤하며 내려갈 뻔 한 것을 뒤에서 잡아주며 어깨를 두드려준 이가 눈을 찡긋했다.

 

 이야기 해줄 것이 잔뜩인데. 좀 더 빨리 걸어보는 건 어때?

 알았어요.

 

 너털웃음이 나오는 그대로 경수가 발걸음을 좀 더 재촉했다. 겨울을 따라 걷는 길의 끝에 새하얀 문 하나만 덩그러니 섰다. 뒤에서부터 따라온 목소리들이 부드럽고 상냥하게 등을 밀었다. 열어봐, 도경수. 꾹 눌린 웃음소리에 경수는 놀림을 당하는 것 같았지만 이유 모를 망설임에 문고리를 잡고서도 주춤했다. 새록새록 그리는 얼굴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열어, 열어. 그 다음으로 나가야지, 여기서 만족할래?

 

 도경수의 손가락에는 여러 가지 색의 실들이 가닥마다 묶여있었다. 오색 실들로 묶인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일 때마다 숨죽인 목소리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머물러 있을 거야?

 

 경수가 고갤 저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아― 뒤늦은 소리에 경수를 품에 가득 안은 형체가 웃음으로 화답했다. 쌓인 눈을 금세라도 녹여버릴 것 같은 애틋함에 경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같이 나아가요.

 

 눈과 새순이 함께 하는 가운데 서서 도경수는 곤히 잠들었다. 깨어나 맞이할 시간까지 고작해야 백일, 남았을 뿐였다.